법철학 주해, 제12장
목적과 전도의 가능성
목적 개념은 신비적이지 않다. 목적 개념은 모든 지향적 활동의 가장 단순한 형식을 지시한다. 빵을 굽는 자는 목적(빵)을 지니고, 수단들(밀가루, 효모, 오븐, 시간)을 선택하며, 결과가 발생하도록 행위를 이끈다.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자, 환자를 치료하는 자, 자전거를 수리하는 자 — 어디에서나 동일한 구조다. 주관적 목적, 수단, 결과로서의 완수된 목적. 배경에는 대개 목적을 동기화하는 욕구가 있다. 굶주림, 질병, 이동성. 그러나 욕구는 목적 자체가 아니다. 욕구는 목적 설정으로 몰아가며, 목적 설정이 비로소 목적을 정식화하고 수단들을 선택한다.
수단을 수단으로 만드는 것은 우선 목적에 대한 적합성이다. 망치는 못을 박을 수 있기 때문에 수단이다. 밀가루는 빵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수단이다. 컴퓨터는 텍스트를 처리할 수 있기 때문에 수단이다. 적합성이 첫 번째다 — 적합성이 수단을 도대체 수단으로 만든다.
그러나 적합성에서 헤겔이 개념 논리학에서 정밀하게 관찰한 어떤 것이 따라 나온다. 수단이 적합할 수 있으려면, 수단은 목적에서 연역되지 않고 수단이 그러한 것으로부터 나오는 고유한 속성들을 지녀야만 한다. 망치는 무게, 단단함, 형태를 지닌다 — 못 박기라는 목적에 의해 비로소 얻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 사물로서 지니고 오는 속성들이다. 밀가루는 특정한 화학적 조성, 글루텐 특성, 효모에 대한 반응을 지닌다 — 빵 굽기라는 목적에서 연역될 수 없고 밀가루가 그러한 것으로부터 나오는 속성들이다. 헤겔은 목적과 수단의 관계를 이중적으로 규정하며, 양 측면이 그의 텍스트에서 한 호흡에 있다. 먼저 한쪽: 객체는 목적에 대항하여 “무력하며 목적에 봉사하는” 성격을 지닌다(TWA 6, 450). 바로 이어서 다른 쪽: “그러나 수단은 또한 목적에 대해 여전히 자립성을 지니는 측면을 가진다”(같은 곳). 둘 다 함께 속한다 — 수단은 봉사하며, 바로 봉사함으로써 자신의 고유한 권리를 가져온다. 이 두 번째 측면을 아래에서 수단의 고유법칙성이라 부른다. [KF]
헤겔 자신이 그로부터 이후 모든 것에 지탱하는 귀결을 끌어낸다. 목적의 활동이 직접적 객관성을 규정하는 데 머문다면, “산물은 다시 수단일 뿐일 것이고, 그렇게 무한히 계속될 것이다. 합목적적인 수단만 나오고 목적 자체의 객관성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TWA 6, 451). 외적 합목적성은 자기에게 맡겨지면 결코 목적에 도달하지 않는다. 모든 결과가 다음 것의 수단이 된다. 헤겔에게 이것은 논리적 결함이며, 목적론이 내적 합목적성으로의 진행에서 극복한다. 우리는 한 사회적 형식이 이 결함을 극복하는 대신 영속화할 수도 있음을 볼 것이다 — 그것이 마르크스가 화폐에서 서술하는 형태다.
이 고유법칙성에서 헤겔이 "이성의 간지"로 서술하는 실용적 귀결이 따라 나온다. 나는 수단을 강제함으로써가 아니라 수단의 속성들을 이용함으로써 목적에 도달한다. 훌륭한 수공업자는 자기 재료를 알고 재료와 함께 작업한다. 나쁜 수공업자는 재료에 맞서 작업하고 실패한다. 못을 박고자 하는 자는 망치의 무게가 자신을 위해 일하게 한다. 전기를 생산하고자 하는 자는 아래로 흐르는 물의 고유법칙성을 이용한다. 간지는 수단들의 속성들을 적으로서가 아니라 동맹으로 획득하는 데 있다.
그러나 여기서 이후 분석 전체에 핵심적인 내재적 가능성도 따라 나온다. 수단이 개별 목적을 넘어 도달하는 속성들을 지니기 때문에, 바로 그 때문에 수단이 목적에 맞서 전환할 수 있다. 수단을 적합한 수단으로 만드는 고유법칙성은 동시에 전도가 침입할 수 있는 지점이다. 수단은 자립화될 수 있고, 다른 목적 연관으로 진입할 수 있고, 자신의 원래 목적을 압도할 수 있다.
이를 구체화하는 세 사례.
노동자를 형성하는 도구. 망치를 사용하는 자는 수단을 사용한다. 그러나 수십 년간 망치로 동일한 동작들을 수행하는 자는 도구에 의해 형성된다 — 손은 대장장이의 손이 되고, 몸은 적응하며, 지각은 망치에서 중요한 것으로 훈련된다. 수단은 노동자 안으로 들어온다. 수단은 역으로 그가 무엇인지를 규정한다. 이것도 결함이 아니라 내재적 가능성이다. 언어를 다루는 자는 언어에 의해 형성된다. 도구들을 다루는 자는 도구들에 의해 형성된다. 제도 안에서 일하는 자는 제도의 루틴들에 의해 형성된다.
자신의 과제를 잊는 제도. 대학은 지식을 보존하고 전수하기 위해 설립된다. 대학은 고유법칙성들 — 행정, 교수 임용 절차, 외부 연구비 획득, 대학 순위 — 을 지닌다. 이 고유법칙성들에 머무는 자는 수단-목적 관계를 시야에서 잃는다. 대학은 그 자체를 운영하고, 지식은 구실이 된다. 제도가 기능하기 위해 필요했던 고유법칙성이 원래 과제에 맞서 전환했다. 병원들도 마찬가지인데, 그곳에서는 청구 논리가 치유 사명을 덮는다. 학교들도 마찬가지인데, 그곳에서는 시험 루틴들이 배움을 대체한다. 그 외의 많은 제도들도 마찬가지다.
생산자를 굴복시키는 산물. 노동 결과로서 손에서 나가는 것은 산출자에게 맞서 전환할 수 있다. 프로그래머가 작성하는 소프트웨어는 나중에 그에게 자신의 노동시간을 소프트웨어 유지보수의 조건들에 따라 조직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 관청이 구축한 행정 기구는 그것을 구축한 직원들을 자신의 고유한 논리로 지배할 수 있다. 더 넓은 층위에서: 인간들이 산물들을 생산하고 이 산물들이 그들의 생활 방식의 지배적 조건이 될 때 — 생산된 관계들이 생산자들을 지배할 때 — 그것은 가장 넓은 형태의 목적론적 전도다. 이 관찰은 주요 저작에서 소외된 노동의 분석으로 확장될 것이다. 여기서는 구조만 가시화하면 된다.
이 모든 경우들에서 동일한 구조가 작용한다. 수단은 수단을 적합하게 만들고 동시에 개별 목적을 넘어 도달하는 속성들을 지닌다. 이 속성들은 오류가 아니라 적합성의 조건이다. 그러나 그 속성들은 동시에 전도가 침입할 수 있는 지점이다. 수단은 자기목적이 될 수 있다. 원래의 목적은 수레바퀴 아래 깔릴 수 있다.
여기에 이후 분석을 지탱하는 하나의 구별이 연결된다. 외적 합목적성과 내적 합목적성의 구별이다. 외적 합목적성은 목적이 외부에서 오고 사물이 다른 무엇을 위한 수단일 뿐일 때 존재한다 — 사용자를 위한 도구, 과제를 위한 기계. 내적 합목적성은 체계가 자기 자신에게 목적일 때 존재한다 — 자신의 보존이 자신의 의미이기 때문에 자신을 보존하는 유기체. 외적 사용 목적에서 따라 나오지 않는 존엄을 지닌 인격. 구성원들이 다른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공동 생활 자체에서 목적을 지니는 인륜적 공동체. 계몽에 대한 헤겔의 비판 — 계몽이 모든 것을 수단으로 만들었고 그로써 모순에 빠졌다. 자기목적이 없다면 수단들은 무엇을 위한 수단인가? — 은 법철학 전체 진행의 척도가 된다. 인격들, 관계들, 삶의 형식들이 단순한 수단들로 격하되는 곳에서는 내적 합목적성이 침해된다. 그것들이 자기목적으로 존중되는 곳에서는 내적 합목적성이 실현된다.
이 통찰들은 다음 부분들에서 여러 번 재귀할 것이다. 인격 실현에 맞서 전환할 수 있는 소유에서. 형식적 평등이 내용적 불평등을 덮을 수 있는 계약에서. 욕구 체계가 자립화 체계로 되는 시민사회에서. 승인의 수단에서 전유의 코드화 기구로 될 수 있는 법 자체에서. 그것들을 인식한다는 것은 수단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 고유법칙성 없이는 적합한 수단도 없다 — 목적을 다시 효력을 갖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의 개념적 해명이 추가되는데, 그것이 이후 분석을 지탱하기 때문이다. 추상적과 구체적의 관계다. 아래에서 추상법이 이야기될 때, 추상적은 이중적, 방법적으로 중요한 의미로 들어야 한다. 첫째: 추상적은 우선 ~로부터 추상하여를 의미한다. 추상법은 인격들을 그들의 구체적 속성들, 사회적 지위, 욕구들로부터 추상하여 인격으로 취급한다. 이 추상은 좋은 추상이다 — 신분 사회에 대한 계몽의 성취, 시민적 평등의 전제조건, 인격들이 법주체들로서 도대체 서로 만날 수 있는 토대. 둘째: 그러나 추상적은 어떤 것이 자신의 구체적 조건들을 상실하고 구체적인 것에 맞서 폭력적으로 관철된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헤겔은 초기 논문 「누가 추상적으로 사유하는가?」(1807; TWA 2, 574–583)에서 이 두 번째 의미를 나쁜 추상으로 특징지었다 — 실제 생활 조건들을 배제하여 자신을 관철시키는 추상. 두 의미는 근대적 소유 질서에서 동시에 살아 있다. 소유 질서는 모든 인격들을 형식적으로 평등하게 승인하는 한에서 좋은 추상이다. 소유 질서는 이 형식적 평등을, 그것이 사실적 불평등이 되는 구체적 조건들에 맞서 관철하는 한에서 나쁜 추상이다. 다음 부분들은 이 이중성을 여러 지점에서 재발견할 것이다. 소유 문제에서, 계약 문제에서, 욕구 체계에서. 좋은 추상을 나쁜 추상에 맞서 방어하고자 하는 자는 둘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