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학 주해, 제9장
9.1~9.3 본질에서 개념으로의 이행
상호작용(7장)은 규정하는 것과 규정되는 것의 고정된 대립이 무너진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각 항은 둘 다이다. 그럼으로써 연관의 통일은 이미 현존한다. 다만 발견될 뿐 고유한 것으로 정립되어 있지는 않다. 개념은 이러한 자기규정의 긍정적 형식이다. 개념은 자기 차이들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자기 고유한 계기들로 정립하며, 그 계기들 안에서 자기 자신에게 머문다. 이것이 7.11에서 전개한 차이이며, 결정적이다. 제어 회로는 자기 항들을 갖지만, 개념은 자기 항들을 정립한다.
헤겔의 개념은 낱말 뜻과 아무 상관이 없다. 헤겔은 개념으로 어떤 사태의 내적 조직 구조를 뜻한다. 그 사태를 그 자신으로 만드는 것이다. 탈신비화하면: “삶의 개념”은 우리의 삶에 대한 정의가 아니라, (유비로 말해) 유기체를 조직하는 유전적 구조 같은 것이다. 개념에 대한 헤겔 자신의 이미지들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그는 보편을 “자유로운 힘”이라 부르는데, 이 힘은 자신의 타자를 포괄하되 “폭력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그 안에서 “고요하게 자기 자신에게 머물러” 있다. 그래서 그것을 “자유로운 사랑과 무한한 지복(至福)”이라 부를 수도 있다(TWA 6, 276 f.). 여기서 뜻하는 바는 이러하다. 모든 사물에는 내적 논리가 있으며, 그 논리가 그 사물의 부분들이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규정한다. 이는 사물들이 마치 주체인 것처럼 들린다(바로 마르크스가 비판한 신비화이다). 그러나 탈신비화된 핵심은 냉철하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개념 파악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것의 내적 구조를 찾아야 한다. 그저 외적 표지들을 나열해서는 안 된다.
A-B-E 구조 —— 논리학의 유전적 코드
구조가 전개되기 전에, 그 구조를 본질논리학에 묶는 헤겔의 문장 하나가 있다. “보편성, 특수성, 개별성은 추상적으로 보면 동일성, 차이, 근거와 같은 것이다”(『철학대계』 1권, § 164). 따라서 이는 세 개의 새로운 규정이 아니라 5장의 세 반성규정(反省規定)이다. 다만 이제 그것들이 더 이상 서로를 배제하지 않게 된 것이다. 헤겔은 같은 숨결에서 그 차이를 말한다. 반성규정들은 “각각 그 자신으로서, 대립된 규정과 분리되어 파악되고 타당해야” 한다. 반면 개념에서는 “그 계기들 각각이 오직 다른 계기들로부터 그리고 다른 계기들과 더불어서만 직접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
그러므로 A, B, E를 새로운 용어라고 여기는 사람은, 여기서 동일한 것이 다시 등장한다는 사실을 놓치는 것이다. 다만 그것이 서로 결속되는 단계에서 다시 등장할 뿐이다.
보편이 무엇인지 헤겔은 강의에서 동물-인간의 차이를 통해 규정했는데, 이보다 더 간결할 수 없다. “인간은 사유하며 보편자이다. 그러나 인간이 사유하는 것은 보편자가 인간을 위해 존재할 때에만 그러하다. 동물도 즉자적으로 보편자이지만, 보편자 자체는 동물에게 대자적으로 있지 않고 언제나 개별자만 있을 뿐이다. 동물은 개별자 하나를 본다. 예컨대 자기 먹이, 인간 등을 본다”.[1] 헤겔은 이어서, 인간만이 “보편자가 보편자를 위해 존재하도록” 자신을 이중화한다고 덧붙인다.
그에 대한 헤겔의 예는 나라는 낱말이다. “내가 나라고 말할 때, 나는 이 개별적이고 전적으로 규정된 이 인격으로서 나 자신을 뜻한다. 그러나 사실상 나는 그로써 나에 대해 어떤 특수한 것도 진술하지 않는다. 나는 또한 모든 다른 사람이기도 하다”.[1:1] 언어에서 가장 개별적인 낱말이 동시에 가장 보편적인 낱말이다. 이 낱말에서 개념을 읽어 낼 수 있으며, 그것은 개념이 전개되기 이전에 이미 가능하다.
이에 덧붙여 헤겔이 1825년에 하는 경고가 있다. 이는 보편을 다룰 때 가장 흔한 오류를 지적한다. 사람들은 보편이 마치 유(類) 속에 종(種)이 들어 있듯 특수를 포함한다고 상상한다. “우리가 보편을 추상적으로 만들고, 그것이 특수를 자기 안에 포함한다는 규정을 제거해 버리면”, 빈 껍데기만 남는다.[2] 추상적 보편은 보편이 아니라 보편의 상실이다.
이 구조는 [systematisches-denken:7]에서 질서 부여 방식들 가운데 첫 번째 것으로 다시 등장한다. 거기서는 헤겔을 전제하지 않고, 누구나 아는 대상들에서 전개된다.
(실험 62) 이것을 수행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이 글을 읽으면서 동시에 세 층위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1) 보편(A) —— 모든 독자에게 타당한 언어, 논증, 논리학의 보편적 구조들. (2) 특수(B) —— 여러분의 문화적, 전기적, 직업적 관점. 곧 이 인간으로서, 이러한 경험을 지닌 여러분이 텍스트를 수용하는 특수한 방식. (3) 개별(E) —— 바로 지금, 이 순간, 이 기분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분 고유의 개별적 반응. 주목하십시오. 특수(B)는 여러분의 아무 특징이 아닙니다. 특수는 여러분의 인간됨에서 생겨나는 특수성들입니다. 곧 보편(이성을 지닌 존재)이 여러분 안에서 구체화되는 역할들과 관점들입니다.
민주주의를 통해 본 A-B-E 구조: A(보편) —— 인민의 자기통치 원리. 이 원리는 필연적으로 특정한 특수화들을 요구한다. 안쪽으로(기관들): 모든 민주주의에는 입법 기능(입법부), 집행 기능(행정부), 판단 기능(사법부)이 필요하다. 이는 자기통치라는 개념 자체에서 나온다. 자기 자신을 통치하는 자는 규칙을 세우고, 집행하고, 검토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바깥쪽으로(유형들): 자기통치는 직접적으로(직접 민주주의 —— 인민이 스스로 결정함) 또는 매개되어(대의제 —— 인민이 결정하는 대표들을 선출함) 조직될 수 있다. 이 구별은 이접적이다. 인민이 스스로 결정하거나 위임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E(개별) —— 지금 여기의 이 구체적 민주주의, 예컨대 독일연방공화국은 두 형식을 혼합한다(원칙상 대의제, 주(州) 차원에서 직접적 요소들). A가 없다면 B는 자의적일 것이다(왜 하필 이 기관들인가?). B가 없다면 A는 공허할 것이다(자기통치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되는가?). E가 없다면 모든 것이 추상적일 것이다(현실성은 어디에 있는가?). 세 계기는 비자립적이다. 그것들은 서로에게서만 존재한다.
논리적 필연성: A 없이는 규정하는 원리가 없고, B 없이는 구별들이 없고, E 없이는 구체적 실현이 없다. 반대 검증: 이 예를 받아들이기 전에 검토해 보십시오. 이 기관들 셋이 자기통치 개념에서 필연적으로 나온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게 맞습니까? 정확히 이 삼분법으로서의 권력분립은 18세기의 발명입니다. 아테네 민주주의는 그것을 몰랐지만 그럼에도 민주주의였습니다. 직접/대의라는 이접도 보이는 것만큼 깔끔하지 않습니다. 추첨제는 어느 쪽 난에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여기서 무엇이 따라 나오는가? A-B-E가 지탱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필연성이 내가 주장했던 층위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필연적인 것은, 자기통치 원리가 현실적이기 위해서는 특수화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기관 없는 자기통치는 자기통치가 아니다. 필연적이지 않은 것은 그것이 이 기관들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특수화를 요구하는 보편과, 역사적으로 발견된 어떤 특정한 특수화 사이의 차이이다.
여기서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은 0.4에서 경고한 방식으로 논리학을 사용한다. 성공한 서술이 증명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정직한 정식화는 더 약하지만 더 쓸모 있다. A-B-E는 원리가 특수화 없이는 공허하게 남는다고 말하며, 그럼으로써 그 원리가 실제로 어떤 특수화들을 지니는지 묻는다. [KF]
A-B-E는 분류가 아니라 살아 있는 운동이다. 보편은 스스로 특수화되고, 특수는 스스로 개별화되고, 개별은 보편으로 되돌아간다.
특수 —— 형식논리학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
고전 논리학은 보편(류)과 개별(요소)만 안다. 헤겔은 특수를 불가결한 중간항으로 도입한다. 형식논리학은 B를 부분집합으로만 본다(무엇이 그 류에 속하는가?). 헤겔에게서 특수는 보편으로부터 전개된다. 특수는 단지 임의의 하위 집단이 아니라 보편에서 도출될 수 있다. 이것이 단순한 집합 관계와의 결정적 차이이다.
특수화의 두 방향: 보편은 두 방식으로 특수화된다. (1) 바깥쪽으로 —— 종들로. 삼각형은 정삼각형, 이등변삼각형, 부등변삼각형으로 특수화된다. 완전한 이접적 분할이 가능하다면(A이거나 B이거나 C이거나, D는 없음), 종들은 보편에서 도출될 수 있다. 이것은 논리학, 수학, 많은 정신적 산물에서 잘 성공한다. 자연에서는 덜 성공하는데, 거기서는 종들이 언제나 유개념(類槪念)에서 완전히 도출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 안쪽으로 —— 부분들(기관, 기능)로. 유기체는 기관들로 특수화되며, 이 기관들은 전체를 위한 수단으로 함께 작동한다. 여기서는 대개 특수화가 어떤 요구 사항들을 충족해야 하는지가 제시될 수 있다. 신체 기관들은 그 생명 형식에서 이해될 수 있고, 조직의 부서들은 조직의 목적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기관들의 구체적 형태를 도출하는 것과는 다르다. 어떤 생명체가 실제로 어떤 기관들을 지니는지는 생명의 개념이 아니라 그 생명체의 역사에서 나온다(9.4b 참조).
핵심은 이러하다. 다양한 B들은 A에서 도출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에만 B는 진정한 특수화이지, 외부에서 부과된 자의적 분류가 아니다.
의자 예 —— 개념이 표지 목록이 아닌 이유: 형식논리학은 정의한다. “의자는 네 다리, 등받이, 좌판을 지닌 앉는 가구이다.” 그러나 왜 하필 이러한 표지들인가? 그 선택은 모아 놓은 것처럼 보인다. 헤겔의 대안: “의자는 앉을 자리이다” —— 이것이 상위 개념(A)이다. 특수화들(B)은 현실적 조건들과의 결합 속에서 거기서 따라 나온다. 좌판은 체중이 지지되어야 한다는 데서 따라 나온다. 등받이는 상체를 편안하게 해야 할 필요에서 나온다. 다리는 좌판이 바닥에서 떨어져야 한다는 데서 나온다. 그리고 여러 의자 형태들(사무용 의자, 왕좌, 바텐더용 높은 의자)은 상이한 앉는 목적들에서 나온다. 부분들은 임의로 모인 것이 아니라 근본 개념에서 체계적으로 따라 나온다. 이것이 안쪽으로의 특수화(기관들)이다. 종들(사무용 의자 대 바텐더용 높은 의자)은 바깥쪽으로의 특수화이다. 둘 다 A에서 도출될 수 있다. 개념은 자기 전개의 원리를 자기 안에 지닌다. (이것이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삶의 이념, 19장에서 비로소 완전히 드러난다. S³ 과정들 —— 자기분화, 자기보존, 자기지양 —— 이 이 특수화의 살아 있는 형식이다.)
이접적 완전성에 관하여: 정신의 대상들에서는 도출 가능성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지배는 타율적 규정(독재, 군주제)과 자기규정(민주주의)으로 완전하게 그리고 중첩 없이 분절된다. 논리적으로 제3의 가능성은 없다. 이러한 완전한 이접적 분할이 바깥쪽으로의 특수화의 이상(理想)이다.
또 다른 예: 자본 증식의 구조(A)는 필연적으로 생산자본, 상품자본, 이자낳는 자본으로의 특수화(B)를 요구한다. 왜 정확히 이 세 형식이 있어야만 하는지 보여 줄 수 있다.
살아 있는 특수화의 예로서의 인간: 인간의 보편 개념(A —— 이성을 지닌 자연적 존재)은 모든 개별 인간(E)에서 동시에 다양한 특수성들(B)로 실현된다. 다양한 역할(부모, 노동자, 시민), 다양한 정체성(문화적, 언어적, 직업적), 다양한 능력들 말이다. 이러한 특수성들은 보편 곁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보편을 구현한다. 각 역할은 인간 존재의 한 특수한 방식이다. 구체적 행위 속의 개별 인간(E)은 이러한 특수성들을 하나의 단일한 삶의 수행 속에서 수행한다. 그러나 그는 그 특수성들의 합은 아니다. 이것이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 이해의 가능성을 좌우하는 이유를 다음다음 절이 보여 준다.
개별 —— 도출될 수 없는 것
개념은 자신의 특수화를 요구하며, 특수화의 형식은 보편에서 생겨난다. 그러나 어떤 경험적 특수성들이 그것을 실현하는지는 그로부터 연역되지 않는다. 앞 절 전체가 이에 의존한다. 개별에서 도출 가능성은 끝난다. 그리고 이것은 방법의 결함이 아니라 사태 자체의 규정이다.
이것을 수행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잘 아는 사람 한 명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에 대해 아는 것을 나열해 보십시오. 출신, 직업, 각인된 것들, 확신들, 소속들. 그런 다음 물어 보십시오. 이 목록에서, 그가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질문에 뭐라고 대답할지 예측할 수 있겠는가? 추측할 수는 있을 것이다. 알 수는 없을 것이다.
가장 가까운 반대 입장은 사회학적 입장이다. 개별은 교차점으로 생겨난다. 한 사람 안에서 많은 원들이 교차할수록 그 조합은 더 유일무이하게 되고, 유일성은 이 조합 이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게오르크 짐멜은 사회적 원들의 교차 이론에서 이를 전개했으며, 기술(記述)로서는 무언가를 적중시킨다. 인간은 실제로 동시에 많은 원들 속에 있으며, 그것이 많을수록 그의 처지는 더 혼동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충분하지 않다. 어떤 사람의 모든 역할, 각인, 소속을 아는 사람도, 그가 그것들을 어떻게 수행하는지는 아직 알지 못한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역할을 어떤 역할에 맞서 세우는지, 그는 그것들로 무엇을 만드는지, 어디에서 그것들을 넘어서는지 말이다. 바로 이것이 개별이다. 개별은 수행된 것의 총량이 아니라 수행의 방식이다. 특수성들의 목록에서 그것들의 상호작용은 따라 나오지 않는다.
그 논리적 근거는 이미 A-B-E 구조 안에 들어 있다. 만일 E가 A와 B에서 도출될 수 있다면, E는 고유한 계기가 아니라 하나의 결과일 것이며, 구조는 세 계기가 아니라 두 계기를 가질 것이다. 구조가 세 계기를 갖는다는 것은 정확히 이것을 뜻한다. 개별은 다른 두 계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무언가를 덧붙인다. 개별은 개념이 단지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실현되는 자리이다. 그리고 실현은 결코 이미 규정 안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렇지 않다면 실현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인식에 대한 귀결: 개별은 도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경험될 수 있을 뿐이다. 이 인간이 행하고 말하는 것으로부터 말이다. A와 B에 대해 아는 것은 *선취(先取)*를 제공한다. 타인에게 다가갈 때 지니는 유용한 기대들이며, 그것 없이는 애초에 시작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들은 결과가 아니라 선취이며, 양방향으로 수정 가능하다. 보편과 특수에 대한 판단도, 개별에 대한 판단도 마찬가지로 수정 가능하다. 그것들을 결과로 여기는 사람은 인식하기를 그만두고 분류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공정한 이해의 규칙을 근거 짓는 이유: 여기서 나오는 의무는, 타인의 입장을 비판하기 전에 그 입장의 가장 강한 형태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예의 때문이 아니라 논리적 이유에서이다. 상대의 입장이 그의 출신, 학파, 환경에서 도출될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생각해 낼 수 있을 것이며 물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기 때문에, 가장 강한 정식화는 재구성될 수 없고 오직 물어질 수만 있다. 그 대신 A와 B에서 상대가 무슨 뜻일지 추론하는 사람은 인격이 아니라 하나의 도출물을 비판하며, 자신이 이미 알지 못했던 어떤 것도 확실하게 알게 되지 못한다.
이것은 양방향으로 타당하다. 자기 자신의 관점도 자기 각인들의 단순한 합이 아니며, 자기 관점을 그렇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신의 선취들을 통찰로 착각하는 것이다.
구조가 해내는 일 —— 두 개의 잘못된 대립
논리적 구조가 지탱하는지는 그것이 무엇을 해소하는지에서 드러난다. 논쟁들에서 정기적으로 해소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는 두 딜레마는 A-B-E로는 더 이상 딜레마가 아니다. [KF]
보편적 가치인가 문화적 다양성인가? 딜레마는 이러하다. 보편타당한 척도들이 존재한다면 문화적 차이들은 무차별한 것이 되거나, 문화들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면 상호 이해가 없다. A-B-E로 이 대립은 분해된다. 모든 인간은 이성의 보편적 구조들에 참여하고(A), 그러나 그것을 자기 특수한 출신을 통해 표현하며(B), 개별 인격들로서 실현한다(E). 세 층위 중 어느 것도 본래적인 것이 아니다. 상호 이해는 A를 통해 이루어지지만, 그것은 오직 B와 E에서만 일어난다.
개인인가 공동체인가? 개별자가 제일이라면 공동체는 단순한 합이거나, 공동체가 제일이라면 개별자는 단순한 기능이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현실적 개별성은 보편적 인간성(A)과 특수한 소속(B)이 개별 인격(E)으로 합류함으로써 생겨난다. 여기서 서로 대립되는 것은 한 개념의 계기들이다.
이 해소가 무엇이 아닌지 주목하십시오. 두 입장 사이의 중재도, 타협도 아니다. 딜레마는 각각 한 계기가 전체로 간주되기 때문에 생겨난다. 그리고 세 계기가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자마자 딜레마는 사라진다(§ 164 참조).
개념계기 대 상이한 것들
논리적 시험: 다른 계기들이 변하지 않고 한 계기를 제거할 수 있는가? 상이한 것들에서는 그렇다(의자들이 있든 없든 탁자는 탁자로 남는다). 개념계기에서는 그렇지 않다. 각 개념계기는 이 계기의 규정성 속에서 개념 전체이다. 보편(화학 법칙들)은 가능성으로서 물 개념 전체이다. 특수(H₂O)는 규정성으로서 그러하다. 개별(여기 있는 이 물)은 현실성으로서 그러하다.
슈테켈러의 언어분석적 독해
슈테켈러는 헤겔의 개념론을 사회적 실천의 문법으로 옮긴다.[3] 보편은 류가 아니라 규범이다. 모든 이에게 타당하고 모든 이가 유효한 것으로 승인하는 것이다. 특수는 규범의 구체적 적용이다. 개별은 사례이다. 지금 여기의 이 구체적 행위 말이다. 이 번역은 보여 준다. 헤겔의 개념논리학은 동떨어진 형이상학이 아니라, 우리가 판단하고 추론하고 행위할 때 행하는 것의 문법이다.
세 가지 환원 —— 논리적 진단
A-B-E 구조는 정밀한 진단 도구를 제공한다. 특수(B —— 문화, 젠더, 민족)를 절대화하고 보편(A —— 보편적 인간 존엄)에서 잘라 내는 사람은 A 없는 B로의 환원을 수행하는 것이다. 반대로, 보편을 특수에 대항시켜 내세우는 사람(“우리는 모두 같다”)은 B 없는 A로의 환원을 수행하는 것이다. 두 형식 모두 A, B, E의 매개에 놓여 있는 진리를 놓친다. 이 통찰은 정치적이 아니라 논리적이다. A 없이는 사회가 공약 불가능한 집단들로 분해된다. B 없이는 사회가 추상적이고 획일화된다. E 없이는 개별 인간이 집단이나 원리에 희생된다.
세 번째 환원은 가장 까다롭고, 그래서 좀처럼 환원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A 와 B를 함께 취하는 환원이다. 여기서는 세분화가 부족하지 않다. 원리는 파악되었고, 특수화들은 주의 깊게 해체되었으며, 개별의 처지는 그 갈래들까지 규정되었다. 다만 그 결과에서 이제 그 인간을 안다고 추론한다. 이것이 9.4b의 오류이다. 개별은 자기 특수성들의 합이 아니다. 실천에서 이 환원은 대화가 아니라 진단으로 나타난다. 타인은 질문받지 않고 분류되며, 그의 반박은 분류의 확인으로 간주된다. 이것은 정보가 많은 이론가들의 직업병인 반면, 처음 두 환원은 정보가 부족한 당파적 추종자들의 직업병에 가깝다.
이 진단을 현재의 논쟁들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한계가 어디에 있는지는 [identitaetspolitik]에서 전개된다.
『논리학 강의』(Vorlesungen über die Wissenschaft der Logik), 2차 전승: GW 23.3, 819쪽. ↩︎ ↩︎
Kehler 필기록, 1825년 강의: GW 23.1, 320쪽. ↩︎
슈테켈러, 『헤겔의 논리학. 대화적 주석』(Hegels Wissenschaft der Logik. Ein dialogischer Kommentar), 3권, 함부르크 2022, 240쪽: 보편은 개념을 그 포괄적 표준 형식에서 규정하고, 개별은 상황적 포섭에서 규정하며, 특수는 개별 사례에 타당한 것에 대한 이해에서 규정한다. ↩︎